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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 음악의 전설이자 싱어송라이터, 배우로 활동하며 약 60년간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돌리 파튼이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파튼의 가족은 화요일 그녀의 별세 소식을 알렸다.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파튼의 홍보 담당자는 그녀가 내슈빌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피플지는 대변인을 인용해 파튼이 "짧은 기간 동안 암 투병을 했다"고 보도했다.
파튼은 생전 음악뿐 아니라 영화와 TV, 사업, 자선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미국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녀의 대표곡인 'Jolene', 'Coat of Many Colors', 'I Will Always Love You' 등은 오랜 시간 사랑받았으며, 파튼은 1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했다. 그래미상은 평생 공로상을 포함해 11차례 수상했다.
여섯 살에 시작된 작곡 파튼의 음악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녀가 처음 노래를 쓴 것은 여섯 살 무렵이었다. 제목은 'Little Tiny Tasseltop'으로, 옥수수 수염을 머리카락처럼 붙인 옥수수 인형을 소재로 한 노래였다. 파튼의 어머니는 이 인형을 신발 상자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파튼은 훗날 "나는 그 작은 인형을 정말 좋아했다"며 "글쓰기를 통해 내 자신과 내 감정을 표현했다"고 회상했다.
여덟 살에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기타를 선물받았고, 열한 살에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노래를 불렀다. 열세 살에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리는 컨트리 음악 공연인 그랜드 올 오프리 무대에도 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음악 활동을 위해 내슈빌로 향했고, 컨트리 가수 포터 웨고너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이름을 알렸다.
웨고너의 TV 쇼에 수년간 출연하면서 14곡의 듀엣곡을 톱10에 올렸고, 이후 솔로 활동을 결심하면서 웨고너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때 파튼이 쓴 노래가 바로 'I Will Always Love You' 였다.
가난한 어린 시절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돌리 레베카 파튼은 1946년 1월 19일 테네시주 피트먼 센터에서 태어났다.
담배 농부 로버트 리 파튼의 12남매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녀는 인근 로커스트 리지의 단칸 오두막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 아비 리는 영국과 아일랜드, 웨일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자주 불렀고, 파튼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파튼은 2020년 로버트 K. 오어만과 함께 쓴 책 'Dolly Parton, Songteller'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잊히지 않는 목소리"라고 회상했다.
파튼이 컨트리 음악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알린 뒤에도 어린 시절의 뿌리는 음악과 삶 곳곳에 남아 있었다.
'돌리 이미지'도 하나의 브랜드로 파튼을 상징하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높이 솟은 금발 머리와 화려한 의상, 하이힐, 강렬한 메이크업 등 독특한 외모 역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파튼은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타이트한 스커트와 하이힐, 빨간 매니큐어와 립스틱, 탈색한 머리를 한 여성을 보고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여성을 두고 좋지 않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파튼은 오히려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외모와 실제 모습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며, 자신이 만든 '돌리 파튼'이라는 이미지를 하나의 캐릭터처럼 생각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약 3,000곡을 쓴 작곡가 파튼을 동시대 가수들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작곡 능력이었다.
그녀는 평생 약 3,000곡을 작곡했으며, 이 가운데 약 450곡을 직접 녹음했다.
파튼은 자신이 쓴 노래를 통해 듣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장면을 떠올릴 수 있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음악은 다른 가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I Will Always Love You'는 파튼의 노래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커버 가운데 하나이며, 'Jolene' 역시 비욘세와 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다시 불렀다.
파튼은 대녀인 마일리 사이러스와도 여러 차례 음악적으로 협업했으며, 사이러스의 아버지인 컨트리 가수 빌리 레이 사이러스와도 함께 작업했다.
음악을 넘어 영화와 사업으로 파튼은 1980년 영화 '9 to 5'로 영화배우로도 데뷔했다. 제인 폰다, 릴리 톰린과 함께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와 같은 제목의 주제곡으로 아카데미 작곡상 후보에 올랐다.
2006년에는 영화 '트랜스아메리카'의 주제곡 'Travelin' Thru'로 다시 아카데미 작곡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 밖에도 'The Best Little Whorehouse in Texas', 'Steel Magnolias', 'Rhinestone', 'Straight Talk' 등에 출연했다.
그녀는 고향인 테네시주에 인기 관광 명소인 테마파크 돌리우드를 조성하는 등 사업가로서도 활동했다.
파튼의 노래 가운데 25곡은 빌보드 컨트리 차트 정상에 올랐으며, 그녀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07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 최고 영예인 조니 머서상을 받았고, 2022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1978년에는 'Here You Come Again'으로 첫 그래미상을 받았고, 1988년에는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만능 여성 엔터테이너상을 수상했다.
음악만큼 컸던 나눔 파튼의 영향력은 음악에만 머물지 않았다.
자신이 "극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밝혔던 그녀는 미국 노동자 계층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대의에 이름과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에는 2020년 밴더빌트대학교의 백신 연구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며 모더나 백신 개발의 초기 후원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또한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영국, 호주, 아일랜드에서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문해력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자신의 고향인 테네시주 지역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제공했다.
고향 카운티는 감사의 뜻으로 법원 앞에 파튼의 실물 크기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2021년 내슈빌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또 다른 동상 건립 제안은 거절했다. 당시 파튼은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정치적 경계를 넘어 사랑받은 스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는 태도와 끊임없는 활동,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모습 역시 파튼의 대중적인 매력 가운데 하나였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았다.
파튼은 자신의 화려한 외모와 대중적인 이미지를 유머로 받아들이면서도, 음악을 통해서는 자신의 삶과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그녀가 남긴 수많은 노래와 영화, 그리고 오랜 기간 이어온 자선활동은 그녀가 단순한 컨트리 음악 스타를 넘어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파튼은 생전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래는 제 유산입니다." 그리고 작곡에 대해서는 "글을 쓸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약 60년에 걸친 음악 활동을 이어온 돌리 파튼은 이제 무대를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노래와 이야기는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 속에 남게 됐다.
*CP24의 글을 번역,편집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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